심리적 거리감이 만들어낸 무감각함: 전쟁보다 장바구니에 집중하는 이유
사람들은 왜 전쟁 뉴스보다 장바구니 물가 인상에 더 즉각적으로 반응할까? 이는 단순히 무관심해서가 아니다. 심리학자 트로페와 리버먼이 제시한 ‘심리적 거리 이론(Psychological Distance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과 시간적, 공간적, 사회적으로 가까운 사건일수록 더 강하게 인식하고 반응하게 된다. 다시 말해, 지금, 여기, 나와 관련된 일이 더 중요하고 실제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란 전쟁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직접적 위협으로 체감되지 않는다면, 그 고통이 아무리 커도 사람들의 일상적인 위기감에는 닿지 않는다.
반면, 오늘 아침 마트에서 달걀 한 판 가격이 8000원을 넘겼다는 사실은 나의 하루 식단을 흔들 수 있고, 실제로 내 월세 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즉각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심리적 거리감은 정보의 객관적 중요성이 아니라, 정보가 ‘얼마나 가까이에서 느껴지는가’에 따라 우리의 반응을 결정짓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물가 상승에 대해서는 항의하고 공유하고 대안을 찾지만, 전쟁 뉴스에는 몇 초간 눈을 돌린 뒤 무심하게 피드를 넘긴다. 이러한 심리 메커니즘은 냉담함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생존 본능에 가까운 선택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우리의 뉴스 소비, 정치 태도, 사회적 행동을 결정짓는 핵심 축으로 작용한다.
가시성과 반복 노출의 힘: 자주 보이는 정보가 더 현실처럼 느껴지는 이유
심리학에서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어떤 사건의 가능성이나 중요도를 객관적 수치가 아니라, 얼마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가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즉, 전쟁보다 물가가 더 쉽게 떠오른다는 것은 단순히 뉴스 빈도의 차이만은 아니다. 일상에서 물가 정보는 마트, 전단지, 유튜브 쇼츠, SNS 밈, 심지어 친구와의 대화 속까지도 침투해 있다. 반면 전쟁 뉴스는 고정된 매체, 고통스러운 이미지, 반복되는 구조 때문에 '정서적 피로(emotional fatigue)'를 유발하며, 점점 시청자에게서 멀어지게 된다.
특히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뉴스는 새로울 것이 없어지고, 사람들은 그것을 '반복 콘텐츠'로 인식하게 된다. 이는 ‘정서적 둔감화(desensitization)’의 전형적인 양상으로, 처음에는 충격을 받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감정적 반응이 줄어드는 것이다. 반면 물가는 '매일 다르고, 내 문제고, 숫자로 바로 이해되는 정보'이기 때문에 뇌의 주의력 체계를 자극한다. 결국 이 반복 노출과 직관적 이해 가능성은 물가 뉴스의 심리적 가시성을 극대화하고, 전쟁 뉴스는 상대적으로 배경화 된다. 미디어 소비가 감정의 우선순위를 재편하고 있는 것이다.
생존 우선순위에 따른 반응 구조: 공감보다 당장의 생계가 급하다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다. 생리적 욕구 → 안전 욕구 → 사회적 욕구 → 존경 욕구 → 자아실현. 이 중 가장 먼저 충족되어야 하는 것은 단연 생존과 관련된 욕구다. 물가 상승은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를 동시에 위협하는 문제다. 고물가로 인해 식료품 구매가 제한되면 생존의 기본인 영양 섭취에 문제가 생기고, 주거비 상승은 삶의 안전성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반면 전쟁은 생존과 도덕 사이의 중첩 지점이지만, 그 타깃이 ‘나’가 아닐 때 사람들의 심리는 이 사안을 ‘도덕적 이슈’로 밀어두게 된다.
이때 우리는 심리적 반응의 재배치를 겪는다. 도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공감', '비판', '연대'의 차원에서 처리되며, 이는 행동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반면 물가 인상, 전기요금, 전세 사기 등의 뉴스는 ‘나의 문제’로 즉각 인지되어 구매 습관, 저축 방식, 정치적 불만 등 다양한 행동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심리적 거리감과 가시성이 생존 우선순위와 결합하면, 우리는 전쟁보다 장바구니를 먼저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냉정함이 아니라 현실의 요구에 순응하는 정서적 합리성이라 할 수 있다.
감정적 자원 소모와 선택적 무관심: 공감의 지속 가능성은 유한하다
현대인은 매일 엄청난 양의 뉴스를 접하며 감정적 자원을 소모한다. 전쟁, 기후위기, 정치 분열, 성폭력, 학대, 부동산 사기 등 수많은 뉴스가 쏟아진다. 그런데 인간의 뇌는 이러한 자극에 무한히 반응할 수 없다. 특히 전쟁처럼 장기화되고 복잡하며, 개인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는 사안은 '감정 회피(affective avoidance)'를 유발한다. 이는 인지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뇌는 고통스러운 자극에 반복 노출될 경우 방어 메커니즘으로 '마비(numbing)'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또한 뉴스는 더 이상 '정보'가 아닌 '콘텐츠'로 소비된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전쟁보다 생활밀착 콘텐츠에 더 높은 노출 우선권을 부여하고, 사람들은 복잡한 분쟁보다 짧고 쉽게 이해되는 정보를 선호한다. 이처럼 심리적 체력의 한계와 정보 소비 방식의 변화는 전쟁에 대한 지속적 공감 능력을 약화시키며, 가까운 물가에만 과잉 반응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문제는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공동체적 연대와 도덕적 감수성 또한 점점 무뎌진다는 점이다.
[표] 멀리 있는 전쟁과 가까운 물가의 심리적 반응 비교
구분 | 전쟁 뉴스 | 물가 뉴스 |
심리적 거리감 | 멀고 추상적임 | 가깝고 구체적임 |
정보 가시성 | 시각 자극은 크나 반복적, 피로함 | 반복 노출, 일상 밀착, 현실 문제 |
정서적 반응 | 초기 공감 → 무뎌짐 | 불안, 분노 → 행동 유발 |
행동 유도력 | 낮음 (감정적 탈진 유발) | 높음 (구매 제한, 불만 표출 등) |
감정도 소비된다, 그러나 의식은 회복될 수 있다
우리는 전쟁보다 물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정서적 무능력함이 아니라, 감정의 효율적 분배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감정의 ‘선택적 투자’는 때로 우리를 이기적인 존재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심리적 구조를 부정하거나 비난하기보다, 자신의 인지와 감정의 메커니즘을 인식하는 것이다.
뉴스를 소비할 때, 우리는 '내 문제'만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 학살, 인권 문제는 언젠가 우리의 현실과도 연결될 수 있다. 물가와 생계가 우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전쟁을 기억하고 공감하는 능력은 도덕성과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는 마지막 방어선이다. 감정도 회복 가능하며, 공감도 훈련 가능하다. 오늘 하루 30초만이라도, 멀리 있는 고통을 떠올려보자. 그것이 진짜 인간의 얼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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